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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수불스님]- 가라앉는 흙탕물, 더 흔들어 일어나는 것 지켜보라현시대 스님들 가르침 2025. 8. 2. 20:50
- 수불스님 서울대생들과 즉문즉답 -
수없는 갈림길서 혼자 돌파하는 것 위험
냉철하게 점검하는 힘 수행으로 가능해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는 지난 19일 오후 4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210호 영원홀에서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안국선원장,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의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
‘젊은날의 화두-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특강에서 수불스님은 1시간30여분 동안 10여명의 청중으로부터 질의를 받고 즉문즉답을 진행했다.
영원홀 100여석을 가득 매운 청중과의 즉문즉답에는 서울대 철학과 조은수 교수가 진행을 맡아 수불스님이 26년간 2만여명의 지도한 실참을 쌓은 이력 등을 소개했다.
먼저 여러분에게 질의를 던지겠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기 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청중 중에 ‘마음으로 본다’는 답변이 나옴)
대개 어떻게 보느냐는 질의에 ‘마음으로’라는 답을 내놓는다.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마음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보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냐.
질의를 하나 더 던지자. ‘자기 눈을 자기가 볼 수 있느냐?’
실제로는 이미 보여지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이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 눈으로 봤기에 보여지는 것이다. 맹인은 손으로 몸으로 느끼는 것이고, 이 차이는 서로 업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마음을 보자. 눈뜨고 죽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눈으로 보게 하니까 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란 정체는 깨닫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생명을 추구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젊은 날에 고민을 많이 하고 나도 했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힌두교의 방식이다. 불교의 선(禪)에서는 ‘나는 누구일까’가 아니라 ‘모른다’ 사실에 주목해, 그런 의도를 취하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다.
종교가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종교 이전에는 철학적 가치가 사회를 지배했고, 또 다른 차원에서 주술과 신화가 있었다.
종교는 공개된 비밀이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렇게 종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종교 안에 우상을 타파할 힘이 있다. 굳이 종교에 빠져서 어리석음으로 갈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종교의 가치관은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지만, 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쉽지 않다.
종교를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달을 길을 철학이 갖고 있다. 그러나 생명체에 대한 생각에서 ‘있고 없고’라는 영역이 종교를 믿게하는 수단이 된다. 사회사상 윤리 등 개념이 추가되더라도 조금 일반적인 개념과 종교적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종교를 통해 지혜에 눈 뜨는 것이 쉬워진다.
그런데 종교를 믿게 하려는 수단으로 종교학 종교이념 등이 생겨났으나, 여기에 물들면서 우리 사회가 희생하고 힘들어졌다.
이제 좀더 생산적 안목으로 변화해서 길 안내를 잘 했느냐를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종교윤리 종교사업 종교의식 이런 영역이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선의 입장에서 정상적으로 길안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생활을 위해 종교를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철학을 위해 철학사상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혜로운 눈을 뜨면 정신적으로 종교가 선도 진리고 악도 진리임으로 알게 된다.
어떤 것도 진리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런 순수함이 영원함이다. 이론적 근거도 제시하면서 실질적 접근하는 것이 선불교의 시작이다.
어리석음으로 지혜로움을 이어갈 수 없다. 생사문제를 어렸을 적부터 머리와 가슴으로 몰두했을 때 갑갑함을 느꼈었다.
이때 헛된 노력을 해서는 안된다. 실질적 노력을 통해 내가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이 변하기 위해서는 스승을 먼저 만나야 한다. 본인 혼자해서는 안된다.
1등 10등이라는 성적순 등표를 보자 10등 학생이 1등 교사를 만나면 1등으로 갈 길을 만날 수 있지만, 10등 교사를 만나서 등위를 올라갈 수 없다.
경쟁이란 스트레스이지만 경쟁은 자신 혼자 나를 찾아서 눈 뜰 수 있는 인연을 만들기 위해 접근하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나는 20대 중반에 혹독한 과정을 거쳤다. 절에 와서 그런 고민을 한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망상을 많이 피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할 경우에는 집중력이 필요하고 정신적 노동이 육체적으로 보다 더 힘들다. 평상인에게 좌선으로 2시간 꼬박 앉아 있는 것은 고문이다.
선가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이라는 말은 알고 앉아 있어야 좌선을 잘한다. 증도가(證道歌)에 말하는 내용은 걷고 머물고 앉는 것 눕은 것 등 동작의 네 가지 근본과 말과 침묵 움직임 중지 등에 대해 일컫는다.
참선은 눈앞에 정신적 벽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이를 검증하는 과정이다. 숙제를 갖고 풀어야 학업이 되고, 이는 누구나 풀 수 있다. 정신적 벽을 마주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난을 때, 자신을 압박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젊을 날 스스로 그런 고민을 유도하고 생사를 걸어 놓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본 경험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닥치면, 생각을 내려놔라고 말해준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대로 내려놔야한다. 잠시라도 그대로 놔두면 마음이 쉬워진다. 육신도 깜박 졸면서 졸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약이다. 늘 깨어 있으려면 힘들기 때문이 그렇다.
자연스레 잠을 자면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선을 하게 되면 그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그 방식을 몇 번 사용해서 육신이 편한해지면 그것도 독이 된다.
우리는 앉아서 잠깐 졸다가 깨면 개운해진다. 마찬가지로 공부라는 망상을 갖고 공부에 들어가면 졸게 마련이다. 원래 잠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그래서 수행의 적을 잠이라고 말한다.
종교를 수단화할 수 있는 힘과 인연들을 좀더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혜의 눈을 뜨게 된다. 그렇게 일반적 개념과 종교적 개념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스스로가 쉬운 입장이 된다. 말을 원래 어려운 것이 아닌가.
질문을 받겠다
학생: ‘마음이 무엇인가’를 답해 달라.
스님: 마음은 허공과 같이 모습이 없으나 허공은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접 체험 할 때야 정체가 있다. 논리적 이론에 의해 접근할 수록 힘들다. 이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라서, 한계를 넘기 위해 수행 체계가 있다.
일반인: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면서 거울에 나타난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스님: 거울에 나타난 허상이라서가 아니다. 본래 무(無)라는 것은 개념이라서 고정 관념에 두고 얘기하기가 어렵다. 불교와 철학은 구별이 있다.
사회 조은수 교수: 추상적 질문보다는 현실적 질문으로 구체화해달라.
스님: 호기심이 오히려 공부를 크게 잘하게 만든다. 질의가 있어야 종교적 가치에 눈 뜰 기회가 다가온다. 현대는 종교가 아니어도 종교적 가치가 파고들 기회를 만들고, 그래서 사회가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가 그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만 종교가 있으므로 인해 그런 변화를 만들어낼 힘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삶의 질이 변하면서, 종교를 믿지 않아도 종교를 소화할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있으므로, 과거에 비해 엄청난 에너지를 갖게 된 것이다.
학생(공과대): 진리를 말하며 ‘생각에 물들이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한 과학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되나.
스님: 부처님은 사람을 같으나 눈 높이가 다르다고 했다. 정신적 영역이 같은 영역이라도 입장이 달라지고, 같은 말도 다르게 듣게 된다. 불교는 유물을 초월하면서 화두를 줄 수 있다. 선어록에 대한 공부에서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자기나름의 시비를 떠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학생: 화두를 받아봤다. 화두를 받아 답답하기도 해서,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스님: 의사없이 병이 나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나 의사를 만나는 것이 적당하다. 의사를 처음에 만나면 화두가 자기도 모르게 들리어진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면 침 한방에 병이 나은 일화와 같다. 정신적 벽에 딱 막히면 갈림길에 직면하게 되고, 수없는 갈림길에서 혼자서 돌파하는 것은 위험하다.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 제대로 된 화두인지를 물어보고나면 더 공부에 진전이 있게 된다.
파견 학생: 재가자로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님: 정신적으로 스승이라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노골적으로 찾아 들어가 제자가 되는 것은 피하라.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든 스승은 마음으로 스승을 모셔라. 나는 화두 타러 갔는데 화두를 주지 않는 스승에 대해 ‘화두달라’ ‘스승으로 모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지났다. 차후 스승의 말 중에 화두를 줬으나 자신이 못알아 들은 것이었다. 나 자신을 최대한 개방해 여유가 있을 때 선의 경험이 온다.
조은수 교수: 화두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나.
스님: 처음에는 간화선 수행을 하지 않았고 조사선 수행을 했다. 당시에는 그 차이를 몰랐다. 그 뒤에 간화선늘 접하며, 조사선으로 아무도 이해못했던 것으로 접근했다. 간화선은 말이 좀 많아지기는 하나 효과적으로 들려지는 것이 많다.
학부형: 왜 수행을 하는가, 왜 스승을 찾아야 하는가. 경험담을 듣고 싶다.
스님: 왜 수행해야 하느냐, 이유는 뭔가. 결국은 행복을 찾는 것이다. 수행을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공부가 둘이 아니다’는 입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면 삶의 길도 더 풍요로워지는 지혜로워지기에 내 자신이 달라진다.
효과적으로 스승을 만나야 한다. 수행도 먼저 공부한 출가수행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차이는 업이 다른 것이다. 찾아들어가는 인연에 눈뜨고 찾아들어가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충실해지는 것이며, 그렇게 업에 충실해야 업을 바꿀 수 있다.
수행자 본연의 자세는 그 업에 충실해, 불교의 가치관으로 눈뜨고 받아들여서 자기가 받아들인 가치관을 수행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행복을 외면하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성문연각(聲聞緣覺) 복지불(福智佛)은 되지 마라’고 부처님은 말씀했다. 소리로만 듣는 제자, 선행없이 복만 추구하는 제가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함께할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학생(미술대학): 진리와 깨달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각성의 과정을 통해 되는 것이라면서,각성을 외부 기준을 자신의 벽을 뛰어 넘은 것이라 했다.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서 체험이 설명 방식에 따라 어렵다.
스님: 종교적 체험은 많이 있다. 선 경험자에 대해 차이점은,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본인 스스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황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 타파 유뮤보다는 현실 속에서 집중력으로 인해 깊이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면 삶이 여유로워진다. 수행체험은 본인도 모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시원하게 툭 터지는 체험, 각성이나 깨달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심취해서 하는 것은 소중하나 집착은 안된다. 집착은 위험해질 수 있다. 이 경우 이에 대해 물을 수 있는 도반이나 스승이 있어야 한다.
대학원생: 점진적 수행 변화 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아잔 브람과의 대화에서 스님은 선불교와 테라바다와 접목을 언급했다.
스님: 남방의 수행법인 테라바다는 수행에 집착하게 만드는 수행으로, 수행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본다. 원만한 수행을 하면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은 정도로 부드러워 진다. 부처님도 ‘너 수행해라’고 많이 말하지 않았다. 제자 앙굴라 마라가 살인자이지만 수행하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쫒아오게 만들어서 스스로 깨치게 했다. 내 밑에 와서 수행하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찾아들어와 수행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남방불교와 북방의 차이는, 남방은 흙탕물를 가라앉히는 것 위에 맑은 것이 유지되나, 밖에서 흔들면 적극적 삶에서 분해가 돼 짜증이 일어난다. 북방은 아예 가라앉은 것까지 흔들어서 없애는 것으로, 처음부터 가라앉은 것을 더 흔들어서 흙탕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북방이다. 북방은 겨울을 나야하기에 수행자라서 생활을 않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방은 의식주가 해결됐다. 남방과 북방의 차이는 엄청나다. 더 흙탕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에서 간화선이 훨신 떠 효과적이다.
의예과 학생: 불교철학을 교양에서 수업받으며, 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 진리 무소유, 색이 공, 공이 색 등으로 삼라만상이 공한 것이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공이니,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또 윤회에서 내가 전생을 살다 태어났다고 하나, 처음 만지는 것들이 전생에 살아와서 조금씩 개달았던 것과 연결되지 않아 현세에 도움이 안된다. 그러면 발버둥 쳐봐도 소용없지 않은가.
스님: 운명론 숙명론에 빠질 수 있다. 공은 생명체가 없이 공일 뿐이다. 공은 영원불변한 공이다. 공 가운데 인연으로 만들어진 구름과 허공은 따로 나눠지지만, 이 둘을 서로 바꿀 수 없다. 무엇이 만들어 냈다는 근거가 없다.
불교의 ‘그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변화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림자와 같지만, 정해진 것은 없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선불교의 요체는 더 이상 어리석어 지지 말아라이다. 적극적인 대처가 요체다. 길안내가 잘 돼야 하고, 안내를 잘 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뒷사람에게 인연을 심어주는 것이다
종교가 가치관을 얘기하기보다 내 머리로 먼저 구분하려고 하면서, 옳고 그른 것은 판단하지 못하니 수행을 통해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다.
학생(경제학과): 먹을 것에 탐욕이 심한데 어떻게 해야하나. 하루 4끼를 먹고 군것질을 많이 한다.
스님: 평소에 먹을 것 많이 생각하나(학생이 ‘그렇다’고 답함) 그건 본인이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생각을 버리고 남에 비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습에서 식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내 안에서 많은 것이 아닌가. 일하는 사람은 많이 먹고 에너지를 많이 쓴다. 식사시간을 바르게 가져가고 본인이 조율해서 밤을 세워가며 버틸 힘이란 정신도 육체도 중요하다. 에너지를 집중시킬 힘이 나오면 굳이 식욕을 바꿀 필요가 없다
교수(자연과학대): 모르는 것을 채워 가는 것과 덜어나가는 것 양자간에 충돌이 있다. 화두 방식이 덜어나가는 것이냐 더해가는 것이냐.
스님: 인연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이 선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방법이다. 선을 직접 체험한 입장에서 하지 않은 사람과 거리가 있다. 과학자 케플러가 고민 속에 해변을 걷다가 깨달음으로 새 이론에 접근했던 것이 예가 된다. 종교를 안믿어도 정신세계가 열리면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해오던 학문을 지속하면서, 고민해오던 입장을 화두를 들고 수행으로 보면 입장 차이가 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의지 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서, 제대로 된 수행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짧은 기간에도 가능하고 10일 안팍으로 점검할 수도 있다. 체험을 하고 난 뒤에, 그 체험이 뭘 뜻하는 것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생(경영학과): 집안이 불교신자다. 어머니가 기도하며 대학가게 해달라고 해서 이는 불교의 집착 말라는 가르침과 정반대 아닌가.
스님: 처음부터 높은 차원의 얘기를 하면 못알아 듣기 마련이다. 다만 평생을 그걸 고수하는 것이 문제다. 기복불교로 불교가 나아갈 길을 열어준 것이나, 이는 불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일반인: 세속적 집착과 성공 욕구를 버리면 소수만의 종교가 되는 것 아닌가.
스님: 더 낮추면, 더 높이면 수행을 어떻게 해야하냐. 이렇듯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해보자 그대로 방치하면 죄이다. 사회에게 죄이다. 부처님보다 사회를 밝게하기 위해 불교의 허물도 지적해야 한다.
학생(생활과학대): 생각이나 관성을 악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
스님: 악습이란 착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경계를 만나서 이건 아닌데라는 관성도 포함된다. 그걸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수행에 있다. 교양 교육은 잠시 눌러 놓는 것이라서 주변에 불편함을 준다. 그걸 알고 소화할 능력을 수행을 통해 배우면 감출 능력이 생기고, 이런 능력을 갖추려면 수행을 해보면 좋겠다.
학생(국사학과): 살아오면서 화난 일은 없었나. 화를 가라 않히는 방법은 있나.
스님: 나는 화가 잘 안난다. 화를 내는 척은 해봤다. 화로 인해 남을 다치게 하면 어리석을 짓이고 통제가 안되는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성낼 분위기를 가져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안맞는 행위에 대해 별로 겪지 않았고, 그래서 화를 안내려고 해서 안낸 것이 아니고 겪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죽음을 상대로 공부하며 될 일이 뭔가. 비굴하지만 않다면 성낼 이유를 굳이 갖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판단할 지혜로운 눈이 필요하다. 돌이켜 냉철하게 돌아보고 점검하는 힘이 필요하고 수행으로 이는 가능하다.
출처 :불교신문(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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