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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행스님 법문] 눈 뜨고 푹 잔다면 그것이 진짜로 죽는 것이다
    대행스님법문 2025. 8. 27. 21:10

     

    ㅇ.마음공부에도 단계가 있는지요.

    문) 마음공부 하는 데도 단계가 있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면 좀더 빠르게 나를 보게 될는지요?

    답) 물론 계단 없는 계단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완전히 죽었을 때 자기가 탄생을 하는 겁니다. 자기 껍데기를 벗고 말입니다. 다 태워 버리고. 그랬을 때에 오관을 통해서 거기 말리지 않고 그 오관을 자기가 부릴 때 그때 도력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지혜와 더불어 선정과 자비가 포함해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해도 그때에 나를 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관을 통해서 부릴 때, 즉 말하자면 오신을 부릴 때 결국 그것은 자기가 다시 보림하려고 그걸 체험하고 돌아가면서 또 놓게 됩니다.

     

    그런데 ‘나 한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나 한 번 죽기는 쉽더라. 나 한 번 죽기는 붙들고 갈 거라도 있어서 그래도 쉬웠는데 두 번 죽기 어렵더라.’ 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한 번 죽어서 탄생을 해서 어린애 임신해서 탄생은 됐으나 도대체 물리를 몰라요. 어린애가 나온 것처럼. 다 자라야 어른 노릇을 할 텐데. 그래서 어른 될 때까지, 성장할 때까지 보림을 다시 해서 놓고 성장을 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그래 성장을 다 시킨 뒤에 또 더불어 같이 죽기 어려워라 하는 겁니다. 같이 죽어서 그게 다 됐다면 더불어 같이 나투기 어려워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까지 이끌어 가는 둘 아닌 한 길인데,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디딜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다가 손 없는 손으로서 닿을 데 없는 닿을 데 있는 데까지 아니 닿는 데 없다 이겁니다. 그르고 옳은 게 하나도 없어요. 만약에 그르다 옳다 이거를 분리한다면 반드시 이건 어긋납니다. 둥그런 그릇에 네모난 뚜껑 덮는 거나 한가지죠.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는 어렵다 했는데,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어렵거든요. 그건 또 둘째라.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휑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야,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아야 합니다.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그런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녁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점차 뚫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죠. 허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우리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하는 그 소리가,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될까요. 나는 만약에 그르고 옳은 것을, 그래서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치게 되죠.

    우리 지구도 부동한 자세로서의 그 긍지를 가지고서 지축이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서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습니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말죠.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난다 이겁니다.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릅니까.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할 수 있죠. 별성이다 이겁니다.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모이는 거죠, 뭐.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리도 요 눈앞이죠. 조그마한 고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나요?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무조건이지, 뭘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만 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어느 스님한테 가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하니까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자는 게 아니죠. 눈 뜨고 자야, 얻다가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게 되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는 무식한 척 둔한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거든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 이 머리로 다 알아 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 이게. 언제 그놈의 오는 거,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그저 모든 게,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입니다. 못난 내 탓.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다 이겁니다. 그 내 탓이라는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가정에서도 무슨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을 참 이익하게, 상치 않게 말을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서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됩니다.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하겠다, 못하겠다. 이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거 다 놔야 됩니다.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돼요.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낳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게 그저 내 탓입니다.

    그 내 탓이라는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ㅇ. 염화미소의 공안에 대해서

    문) 『법화경』에 보면 “백만 대중이 부처님께서 전법의 설법을 하신다고 하니 손에 식은 땀을 쥐고 눈만 반짝거리고 숨 하나 쉬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대범천왕이 드린 꽃가지를 들고 법단에 오르시자마자 그 꽃가지를 번쩍 들어서 대중에게 보일 뿐,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때 백만 대중은 그것이 무슨 영문인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중 단 한 사람 마하가섭이 그 이치를 알았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다.” 이렇게 나와 있는데, 그 염화미소의 공안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꽃 한 송이로 마음을 전한 이치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데 좀더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답) 백만 대중이라고 했습니다. 백만 대중 하면은 벌써 그건 꽃 한 송이로 표현이 됩니다. 백이라는 숫자도 없고, 만이라는 숫자도 없습니다. 대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체 포괄된 하나에서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 평상심입니다. 이 평상심에 그 모두를 한꺼번에 든 자체의 꽃 한 송이는 꽃으로 보아서는 안 되죠. 그 마음을 드러낸 것이죠. 그 전체적인 포괄된 하나의 꽃을 드는 순간, 벌써 꽃은 들기 이전의 평상심이지요. 그렇다면 평상심에 전체적인 것 하나를 이렇게 내보일 때, 벌써 가섭 존자는 그것을 같이 포함해서 전체적인 하나를 또 웃음으로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땐 이게 어디 전체가 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과 가섭 존자 두 마음만 같이 혼합이 된 게 아니라 전체적인 혼합입니다.

     

    여러분도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 든 이유와 또 가섭 존자가 씽긋이 웃은 이유를 소리를 들어서 다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귀로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 하기 이전에 우리가 ‘아! 그랬다더라. 그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이렇게만 그저 귓가에서 들어서 넘기고 말곤 이렇게 하죠, 모두가. 그런데 부처님이 그 꽃 한 송이 들 때, 그 꽃 한 송이에 어떠한 것이 거기 포함돼서 그게 방편으로서 꽃 한 송이가 번쩍 들렸을까요? 그 꽃 한 송이에 꽃 한 송이 있는 게 아니라 꽃을 들었다는 데에 문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웃는 얼굴이 아니라 웃었다는 그 가섭 존자의 문제가 있죠. 그런데 이것은 가섭 존자와 부처님과 그 꽃 들은 거하고 말이에요, 도대체 그 꽃도 없고 웃은 것도 없었어요.

     

    그것은 왜냐하면, 그 도리를 간단하게 비유를 하자면, 항상 그거를 내가 얘기해 드려도 여러분이 이론으로 듣는다면 이론일 것이고, 누구나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게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전체가 이해가 안돼요. 없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고, 있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고, 웃었다 해도 이해가 안되고, 꽃을 들었다 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즉 말하자면 한자리! 하나를 번쩍 쳐들 때는 벌써 주고받는 사이 없이 가섭 존자가 법을 이어받았다. 한자리를 말하고 공심을 말한 거죠.

     

    그래서 항상 그런 말을 하고 있죠. 공심, 공용, 공체, 공식. 이것을 항상 얘기하죠. 그럭하는 데에 그 묘심, 정법안장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여러분이 정법이라고 하는 거 다르고, 그분이 정법이라고 하는 그 말이 다른 거예요. 왜 그게 다른 거냐. 깨닫지 못하고 정법이라고 하는 거는 그건 말로 떨어지는 거고, 그분이 정법이라고 한 것은 말없이 꽃 한 송이 든 게 바로 그게 정법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문제가 무슨 공심이니 공용이니 공체니 이런 것이 귀합된 하나의 근본을 가지고서 한번 근본을, 즉 말하자면 꽃 한 송이로 비유해서 탁 들었을 때는 우주 전체가 다 들린 거예요.

     

    그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앉아서, 몸이 다녀서 전부 가정이나 또 사회, 국가, 세계, 이렇게 다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 무루의 법, 유루의 법이 이렇게 등장을 하고 있는데 저 숱한 별들이 모두가 나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깨달아서 둘이 아니라고 할 때, 그 모두가 돌 하나도 나 아님이 없을 때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묘심이 되면 묘용을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자체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얘긴데, 어마어마한 작용인데도 우리는 그걸 느끼질 못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듣고 넘어가요, 그냥. 그 실감이 안 나니까.

     

    소인은 죽 끓고 밥 끓는 거 쫓아다니면서 그거 냄새나 맡지만 대인은 그런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 뜻은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 즉 말하자면은 무루에,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 공심의 묘용이 다 나인 거예요. 나라고 했다고 해서 나 하나만을 지금 세우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각자 모두가 그렇게 지금 물질로만이, 유위법으로만 사니깐 그렇지 무루와 유루가 한데 합쳐져서 나 아님이 없을 때에 그 힘을 어떠한 환경에 따라서, 이러한 환경이라면 이런 데 쓰이고 저런 데 환경이라면 저렇게 쓰고, 이걸 맘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묘용이 바로 능히 여여하게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말을 한다 할지라도 부처님께서 말없이 해 놓으신 그 말씀이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말이나 이 뜻을 모르고는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좋은 말을 말없이 좋게 꽃 한 송이를 들어서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를 싸고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없이 들었건만 이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가 밥 한 그릇 이렇게 주워 먹는 것만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이것이 바로 그 꽃 한 송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날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을 역을 해서 수만 경을 설해 놓았습니다만 그 뜻을 알고 지내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었겠습니까. 그 뒤로 수백의 선사들이 났고 그 밑으로 참 많은 또 큰스님네들이 났습니다. 그렇지마는 진짜 우리가 그 꽃 한 송이의 뜻을 알고 지내느냐 못 지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에 의해서 좇아가려고 하지 말고 그 뜻에 의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든다면, 바로 우리는 그 부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뜻을 아마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사량으로 알려고 앨 쓰지 마시고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체득해 보시기 바랍니다.(2013,1.4)

     

    ㅇ. 마음 도리 알고 가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문) 한동안 환희심에 차서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몸에 병이 생기고 고통이 커지면서 공부도 뒷전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도 이 마음 도리는 알고 가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정신 차리게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답)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참 위급하고 모든 게 그냥 급급하고 아주 죽겠지만, 이런 얘기도 있죠. 세상에 나온 게 없기 때문에 갈 것도 없노라고요. 옮겨 놓을 뿐이지 어디 갈 게 있으며 어디 올 게 있는가. 본래 근본 그 불성 자체의 성주는 그대로 있건만 몸뚱이가 떨어져서 지수화풍으로서 다 흩어진다는 거. 그러나 그것도 매장할 때 얘기지 지금은 화장하니깐 뭐 지수화풍으로 흩어지고 말고도 할 것도 없어요. 지금은 이렇게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 뜻은 다 같죠.

     

    그러니 이 몸뚱이가 살 양으로 애쓰면 죽어지고 죽으려고 한다면 살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죽으려고 살려고 하지도 말고 그저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 만든 것이 너기 때문에 부숴 놓는 것도 너, 아프게 하는 것도 너, 고장난 것도 너니까, 네가 한 거니깐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탁 맡겨 버리세요, 그냥. 맡겨 버리면 다 알아서 할 건데 맡겨 놓질 않기 때문에 그놈의 걸 안 해 주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도 아, 공장에 취직을 해서 갔는데 맡겨 주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고 맡겨 줘야 일을 하지, 잘못하든 잘하든. 그래서 한 번 잘못한 건 병가지상사라고 이것이 한 번 잘못했다 하면 그건 능력이 늘어 가지고선 ‘아, 요럭하면 잘못하지 않는 거로구나.’ 하고 한번 이렇게 돌려보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모든 일체를 쉬어라, 놔라, 맡겨라,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감사해라. 모든 것은, 너의 몸뚱이는 네 주인의 시자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시자가 주인에 의해서 움죽거릴 뿐이지 너는 쉬어야 된다. 너와 더불어 모든 일체를 다 바로 쉬어라 하는 거죠. 그것은 종 문서를 놓지 않고는 절대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느 스님께서, 내가 그때에 스무 살도 못 될 때예요. “스님, 얼마만큼 가면은 죽습니까? 죽으려고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아요.” 하니까, 내 몸뚱이가 죽는 줄 알고 말입니다. 이 안에서 죽어라, 죽어라, 자꾸 ‘죽어라’ 그러거든요. 이거 몸뚱이가 아주 죽어 버리라는 줄 알고 그냥 차 속에도 들어가고 막 그랬거든요. 근데 안 죽어져요.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스님, 얼마만치 가면 죽습니까?” 하니까 눈을 뜨고 푹 자라는 겁니다. “눈을 뜨고 푹 자야만이 죽느니라.” 그러거든요. 그거예요, 바로! 여러분이 눈을 뜨고 푹 자지 않으면 통과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이러는 것도, 즉 말하자면 전자자동기에 의해서 이게 그대로 돌아가는 거죠. 내 마음에 의해서 스위치만 눌렀다 하면은 그냥 자동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도 한마디로 규정을 지었지 않습니까. 한 점의 마음에 있는 거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남 달린 코도 달렸고 남 달린 눈도 달렸고 귀도 달렸고 이 오관을 통해서 엽렵하고 똑똑하게들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에서 한 칼을 뽑았다면 그냥 낄 수는 없지요.(2013.1.18)

     

    출처 : 현대불교(https://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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