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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마하리쉬 말씀] 지성(知性)을 통해서는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나는 누구인가? 2025. 10. 26. 20:54
마하리쉬 : 누구나 '내가 있다'(I am)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를 육신과 혼동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절대자에게서 일어나지만, 지성(知性)을 낳기 때문입니다.
지성 안에서 '나'는 육체의 크기와 형상으로 보입니다.
'지성으로는 아니고'라는 말은, 지성으로는 부라만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라만에서 아함(aham, 나-나)이 나오고, 아함에서 다시 지성이 나왔읍니다.
그러한 지성이 어떻게 아함을 넘어가서 부라만을 발견할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나'가 그 몸이라는 거짓된 개념만 넘어서십시오.
그 생각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를 발견하십시오.
현재의 '나'라는 것(I-ness)이 사라지면 그 발견은 끝납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순수한 진아입니다.
깊은 잠과 생시를 비교해 보십시오. 다양성(현상계)과 몸은 생시에서만 발견됩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진아가 남아 있지만 몸이나 세계를 지각하지 못합니다.
거기서는 행복이 지배합니다.
경전 말씀인 "나는 부라만이다(Aham Brahmasmi)'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언을 계속 암송한다고 해서 부라만이 될 수 없읍니다.
그것은 부라만이 다른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참나입니다. 그 참나를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부라만을 발견합니다.
마치 부라만이 어디 먼곳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문 : 생각들이 워낙 집요해서 아함에 도달할 수가 없읍니다.
마하리지 : 부라만형상의 관념은 마음을 다른 생각들로부터 돌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수행은 얼마간 할 필요가 있고, 아니면 깨달은 스승들과 친교해야 합니다.
깨달은 사두들은 이미 마음을 극복하고 평안에 안주해 있읍니다.
그의 친존은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상태가 일어나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두와 친교하려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읍니다.
'육체가 나다'는 자기를 한정하는 것이며, 모든 비천하고 이기적인 행위와 욕망들의 뿌리입니다.
'부라만이 나다'는 이런 한정을 넘어서는 것이며, 동정, 자비, 사랑 등 신성하고 덕스러운 것들을 의미합니다.
문: 재가자는 해탈을 추구하는 공부를 어떻게 해나가야 합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왜 자신이 재가자라고 생각합니까?
설사 그대가 산야시로 나선다 하드라도 그와 비슷한 생각(자기가 산야시라는 생각)이 그대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계속 가정에 있든 그것을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든, 그대의 마음은 그대를 따라 다닙니다.
에고가 생각들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육체와 세계를 창조하고,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한사람의 재가자라는 생각을 산야시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정이라는 환경을 숲이라는 환경으로 바꾸어 놓을 뿐입니다.그러나 마음의 장애들은 항상 그대로 있읍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더 커질 수도 있읍니다.환경을 바꾸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읍니다. 장애물은 마음입니다.
집에 있든 숲 속에 있든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만일 숲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집에서라고 왜 못하겠읍니까?
그러니 환경을 왜 바꿉니까? 어떤 환경에 있든 그대는 바로 지금 노력할 수 있읍니다.
환경은 그대의 욕망을 따르며, 결코 그대를 저버리지 않읍니다.
저를 보십시오. 저는 집을 떠났읍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가정이라는 환경을 떠나 여기 왔읍니다.여기서 무엇이 변합니까? 이곳이 여러분이 떠나온 곳과 다릅니까?
설사 우리가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몇년씩 들어가 있다해도, 거기서 나오면 자기가 있어야 하는 그 환경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쌍카라가 그의 탁월한 저작인 <분별정보-비베카츄다마니>에서 무상삼매보다 본연삼매(本然三昧)가 더 낫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 있든 우리는 자발적인 삼매-즉 자신의 원초적인 상태에 있었야 합니다.
마하리쉬 : 조식(調息, 호흡제어)은 내적일 수도 있고 외적일 수도 있읍니다.
내적인 조식은 다음과 같읍니다.
(1) 나한 찐다(nahan chinta)['나는 몸이 아니다'는 생각]가 날숨입니다.
(2) 꼬함(koham)[나는 누구인가?]이 들숨입니다.
(3) 소함(soham)[내가 그다]이 멈춤입니다.
이렇게 하면 호흡은 자동적으로 제어됩니다.
외적인 조식(들숨,날숨,멈춤을 조절하는 호흡)은 마음을 제어할 힘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만큼 확실한 방도가 없읍니다.
아니면 사두와 친교해야 합니다. 만일 사두와 친교하지 못한다면, 외적인 수련을 할 때는 현자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두와 친교하면 그 사두가 남들이 보지 않게 그 수행자에게 필요한 힘을 줍니다.
조식은 하타요가에서 말하는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읍니다.
만일 염송,명상,헌신 등을 한다면 그저 약간의 호흡제어만 해도 마음을 제어하는데 충분합니다.
마음은 말타는 사람이고 호흡은 말입니다.조식은 말을 제어하는 고삐입니다.
이 고삐를 제어하면 사람도 제어됩니다.
조식은 그저 약간만 해도 됩니다. 호흡을 지켜보는 것도 조식의 한 방법입니다.
다른 활동으로 분산되던 마음이 호흡을 지켜보는 데 몰두합니다.
그러면 호흡이 제어되고, 그러면 다시 마음이 제어됩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날숨과 들숨 수련을 할 필요가 없읍니다.
숨은 염송, 명상등을 하는 동안에도 잠시 멈추는데 , 그럴 때도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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