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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행스님] 인간의 마음은 어디 아니 미치는 데가 없다
    대행스님법문 2026. 2. 11. 21:52

     

    이 세상에 어느 물질도 돌지 않는 게 없습니다

     

    내가 없는 가운데

    바로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구나.

    산과 물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구나.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질문 : 새해맞이 촛불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맘때쯤은 늘 새롭게 마음을 다잡게 되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할까요. 작심삼일이 되지 않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이 촛불재라는 것은 모든 유의 법이나 무의 법에서 내가 형성되고 살아나갈 때에 컴컴했던 일을 다시금 내 깊은 마음으로 인해서 두뇌로 밝은 물리 지혜를 내기 위해서, 또 항상 뿌리가 깊은 밝음을 스스로서 밝게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이건 들고 켜고 하는 데에 방편이라고 하지마는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나무가 저쪽 나무를 찾고 이름을 부르면서, 예를 들어 소나무가 향나무를 찾으면서 “향나무여! 향나무여! 내가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에너지를 좀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기도를 해 봤던들 그 향나무에서 소나무로 에너지가 갈 수가 없어요. 반드시 제 나무의 뿌리만이 자기 나무를 위해서 올려보낼 수 있죠. 그런데 그 나무는 잎새 하나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전부 그 뿌리에 매달려서 살면서도 뿌리를 무시한다 이겁니다. 아니, 여러분이 그 뿌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알쏭달쏭하게 생각하고 못 믿어서 그렇죠. ‘뿌리만이 나무 전체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거를 못 믿어서요.

     

    먼저 배웠고 나중 배웠고 이걸 떠나서, 진짜 물리가 터져서 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진실한 마음이라면,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한다면, 둘이 아닌 도리에서 체험을 하고 이렇게 가는 것이 바로 참선이며 바로 지름길이다 이거죠. 내가 여러분한테 항상 했던 말 되하고 했던 말 되하고 이러는 것 같지만, 여러분이 한마디 듣거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손 한 번 튕기는 걸 가지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지 못하니까 되풀이하게 되죠.

     

    왜 절에서 종을 울리는 줄 아십니까? 영혼들을 전부 불러서 종소리를 들려 줌으로써 ‘이 종소리를 듣고 영혼의 귀가 뜨이고 눈이 뜨여서 이 도리의 섭류를, 이 세상만사 돌아가는 섭류를 알아라. 네가 이거를 알아야 영원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하는 소립니다, 그게. 그러니 이 마음의 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려 세 사람이 갔는데 한 사람은 ‘아이구! 그거 정말 그럴까? 에이,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아예 믿질 않았답니다. 또 한 사람은 자기 뿌리를 진짜로 믿고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잘났든 못났든, 그 못난 뿌리만이 못난 나무를 위해서 모든 거를 100% 다 해 주겠지. 우리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내 부모이듯이.’ 그러면서 지극하게 믿고, 부모의 제삿날인데도 차릴 게 없으니까 그저 보리죽을 쑤어서 죽 한 그릇을 부뚜막에 놓고, 물 한 그릇 떠 놓고, 향 한 개비 사르고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 뿌리, 엄마 뿌리, 내 뿌리 이 세 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닌 한 뿌리니까 한자리를 하소서. 그러면 시장했던 모든 것이 한 떡으로 화해서 바로 양식이 되리다.’ 하고 이렇게 그 부모를 위해서 했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가난하던 사람이 말입니다, 어떤 친구가 별안간에 찾아와서 마름을 주더랍니다, 일 좀 해 달라고. 그러면서 그 친구가 어디로 이사를 가는데 다 맡기고 가더랍니다. 그럭하다 보니까 아주 잘살게 됐더랍니다. 그 나중 얘기는 생략하고요. 그랬는데 그 못 믿은 사람,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못 믿고 그런 사람은 못 믿는 것만큼 그렇게 살더랍니다. 즉 말하자면, 나무로 친다면 잎새가 단풍이 들면 떨어지듯이, 뿌리는 영원하지만 그 잎새는 그냥 떨어지고 없어지더랍니다. 또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사람은 가지가 돼서 추운 겨울에 발발 떨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더랍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 자체가 살아나가는 데에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똑같이 중병이 들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완쾌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완쾌가 못 돼요. 그게 누구의 탓입니까? 제삼자가 대신 밥을 먹어서 남을 진짜로 배가 부르게 해 줄 수는 없는 것! 한마음으로서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같이 거들어 주는 건 모르지만, 자기가 벗어나려면 자기가 자기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사실입니다. 진짜로 자기 뿌리를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아니, 그건 떼려야 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태양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태양이, 아무리 태양이 광대무변하게 비춰 준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티끌 같은, 한 개의 촛불 같은, 그런 조그마한 한 티끌의 불씨 자체보다는 못하다는 얘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온 누리를 태양보다도 더 깊고 무변하게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땅속이나 물속이나 어디 아니 미치는 데가 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태양의 근본도 바로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우주의 근본이 전체 한데 합쳐서 한마음의 근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여러분의 참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더욱더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없는 도리에 대해

     

    질문 : 마음공부를 하려면 우선 내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 하시는데 머리로는 조금 알 듯하면서도 확연히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 참, 마음이라는 것이 상당히 요상합니다. 색깔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마음 내기 이전을 말해서 자기 불성이라고 하죠. 영원한 근본이라고도 하고 뿌리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 마음을 냈다 하면 법신이라고 하고, 그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린다 하면 화신, 응신이라고 하죠. 화신은 바꿔지는 걸 말하고 응신은 서로가 대하는 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마음을 안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를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 몸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이냐 심장이냐 위냐 식도냐, 방광이냐 콩팥이냐 정맥이냐 동맥이냐 하는, 일체 이름해서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바로 어떠한 부분에서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동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많은 생명체들이 작용을 하는데 어떠한 것이 작용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알아보신다면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각나기 이전에도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고, 또 생각을 냈을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몸이 움죽거릴 때나 육체 속에서 정맥 동맥이 움죽거릴 때, 또는 눈 귀가 움죽거릴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이 천차만별의 이름이 전부 내 한 그릇에 있습니다, 내 몸뚱이 한 그릇에. 그런데 그게 다 누가 하는 거죠? 누가 하는 겁니까? 모두 본인이 하는 거죠? 남이라고 할 수 없죠? 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어떠한 거위 한 마리도 나 아님이 없죠? 그러니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안 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어떠한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나는 없다’ 하는 겁니다. 나는 없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실 때, 여러분 자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맥, 동맥이 쉬지 않고 뛰면서 이어져 돌아가는데, 정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체를 볼 때에 어떤 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없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 나는 공동체야! 공동체니만큼 모든 것을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손도 손 없는 손이 하고 있다. 그리고 없는 발이 한자리를 디뎠다. 이게 평발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그래서 여러분 법이,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작용하는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고, 여러분이 법신이자 부처님이자 바로 화신입니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로서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응신으로서 베푼다 이겁니다. 타의의 어떠한 신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나 자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부터. 내 자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걸요.

     

    나 자체가 나왔으니까,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자체가 모두, 바로 악업 선업이 인과가 돼서 영혼의 근본과 더불어 같이, 어머니의 살을 빌리고 아버지의 뼈를 빌려서, 즉 정자와 난자를 말하죠. 그래서 합류화돼서 합성체제로서 형성이 됐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두 몸속에서 작용을 하는 거나 외부에서 내 몸뚱이가 작용하는 거나 모든 것이 전체가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왜? 어떤 걸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죠.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 하랴, 남편 노릇 하랴, 아들 노릇 하랴, 형님 노릇 하랴, 아우 노릇 하랴, 사위 노릇 하랴, 친구 노릇 하랴, 사회에 나가서는 어떠한 회사나 직장에 있다든가 어떠한 지위를 가졌을 때 또 이름이 붙죠? 그러니 따로따로, 몸뚱이 체가 따로 있어서 따로 행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아주 묘법이죠. 그게 묘법입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여보!” 하면 뜻과 행과 말이 동시에 남편이 되는 거죠. 그런데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아버지 노릇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그거나 그 지금 말씀드린 거나 모두가 하나로 통과가 됩니다. 이 모두가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없는 까닭에 모두가 공했다는 겁니다.

     

    ‘모두가 공하고, 모두가 함이 없이 했고, 모두가 비었다. 어느 것도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 내가 없으니 물이 있으랴. 물이 없으니 강을 건널 게 있으랴.’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 한 찰나, 찰나라고 하는 소리도 그 까닭입니다. 찰나에 아버지가 됐다 찰나에 남편이 됐다 이렇게 하듯, 부처님의 마음도 역시 그렇게 찰나에 바로 칠성 부처가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관세음보살이 됐다가, 약사가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온통 그렇게 화해서 나투죠. 자동적으로 이게 됐다 저게 됐다 이게 됐다 저게 됐다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하고 계시니까 그걸 납득을 하시죠?

     

    그래서 부처님 마음도 동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서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지장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든가 어떠한 이름이든지 그거는 이름일 뿐입니다. 지금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다 남편이다 아들이다 하는 거는 바로 이름일 뿐이죠. 그런데 이름이 자동적으로 누구한테나 주어졌지만 누구한테나 주어진 그 이름이 진실하기도 합니다. 영원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알고 본다면 그렇게 공하고 그렇게 “내가 없는 가운데 바로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구나. 산과 물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구나.”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기도 하고 말로 어떻게 형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잘 배우고 권세나 모든 게 아무리 다 좋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한다면 망하든지 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미치든지 성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음의 꼭지에 달려서 끌려다니고 움죽거리는 체(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이익 되게 하는 삶 살고자

     

    질문 : 지금까지 저는 저밖에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저도 큰스님처럼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남을 이익 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답변 : 이 마음 도리를 완전히 터득하신다면 여러분도 다 남을 위해서 이끌어 줄 수 있는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혈을 해서 죽게 됐는데 병원엘 가니까 도무지 그쳐지질 않더랍니다. 그래서 전화가 왔어요. 그것도 미국에서요, 한국으로. 그래서 그랬습니다. “관해라. 알았다.” 그랬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멈췄더랍니다. 그래서 한번 찾아와서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 드려도 그 신세를 못 갚겠다고 하더군요. 애 다섯을 두고 자기가 죽었더라면 어떡할 뻔 했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죠. “이것 봐. 나만이 당신을 위해서 해 준 게 아냐. 너의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한데 붙어 있기 때문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야. 이 도릴 알아야 해. 못났든 잘났든 내가 없어도 아니 되고 상대방이 없어도 안 되는 것을 말해서 상대성 원리라고 해. 그러나 우리의 참다운 참(眞)은 ‘누가 해 줬다, 고맙다’ 이러기보다도 고마우면 자기 주인공한테 고맙다고 해라 이거야. 자기를 리드해 나가고 자기를 운전하는, 자기를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이렇게 하는 자기의 원동력을,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을 진짜로 감사하게 생각하라.” 이러고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를 만날 수도 없고 종교라는 것도 없고 세상도 없어요. 내가 없는데 뭐가 있어요. 못났든 잘났든 여러분만이 귀중한 겁니다. 나부터 귀중한 걸 알고 나부터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나부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면 아마 자기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벗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불교는 참 알기가 어려워.” 이러는데 그게 아닙니다. 불교는 진리입니다. 그냥 우리가 살고 나가는 그 생활 자체가 그대로, 여러분이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서서 다니고 또 앉아 있고, 이 네 가지를 포함해서 본다면 그대로 참선입니다. 공기 주머니가 만약에 버스라면 여러분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복닥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 시간과 공간은 초월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어느 물질도 돌지 않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볼 땐 정착돼 있는 걸로만 보이죠. 우리가 거꾸로 섰든 바로 섰든 바로 서 있는 것 같죠? 그러니 생각하면 개미의 살림이나 우리의 살림이나 수천수만 그 천차만별의 삶이나 뭐가 다릅니까? 좀 차원이 높고 낮고 이것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똑똑히 나를 보라. 각자 말입니다. 각자 자기를 보라. 자기 몸뚱이 속에 얼마만큼 생명들과 모습들과 의식들이 들어 있나. 내가 밥 한 그릇을 먹고 물 한 컵을 먹을 때 내가 먹는 건가 한 번쯤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몸뚱이도 지구와 같고 우주와 같고 세계와 같은 겁니다, 몸뚱이 하나가. 모든 분야에서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다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용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무엇이 부족하면 부족한 거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수분이 부족하면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물을 먹는데 그 물을 누가 먹는 것입니까? 그 육신 속의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먹으며 우리는 심부름을 해 주는 바로 심부름꾼이다 이거죠. 그러나 알고 보면 심부름꾼이 따로 없습니다. 안에서도 그거를 줘야 작용을 해 주고 또 바깥에서도 그렇게 심부름을 해 주지 않는다면 안에서 작용을 못 해 줍니다. 더불어 같이 사는 한마음입니다.

     

    그러니 내가 따로 없죠.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아버지가 됐거나 어머니가 됐거나 한 가정에서 살아 보실 때 자연스럽게 “엄마!” 하면 엄마가 되시죠? 그런데 남편이 들어와서 “여보!” 하면 금방 자동적으로 그냥 아내가 되시죠? 남녀를 막론해 놓고 그렇죠. 그뿐인가요? “형님!” 하면 형님이 되고 “얘, 아무개야!” 하면 아들이 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해서 나중에 아들이 되고 남편이 되는 게 아니죠. 그냥 동시에 그냥 해 버리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사실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하나 해 나가고 살아나가는 게 과학적이며 바로 천체물리학적이기도 하고 천체의학적이기도 하고 천체과학, 이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몰라서 그렇죠.

     

    그래서 도라는 것은 내가 남이 목이 마를 때 물을 줄 수 있고, 내가 목마를 때 먹을 수 있어야만이 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진짜 인간으로서, 자유인으로서 그렇게 벗어나는 대장부로서 일컬은 사람이라면 그쯤은 돼야 된다는 얘기죠. (260206)

     

    출처 : 현대불교(https://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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