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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마하리쉬 말씀] 고통은 신을 깨닫는 방도입니다나는 누구인가? 2026. 4. 5. 20:38
ㅇ. 인도 정부의 철도 위원회 관리인 끼쇼릴랄씨는 델리 출신이다.
그는 5년전에 스리 크리슈나 헌신자가 되어 헌신파 수행체계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나중에는 어떤 성자를 만나서 베단타를 베워서 무형상 신에 대한 숭배에 대하여 배우고, 그의 지도에 따라서 베단타 관련 책 700권을 읽었는데, 여기에서 <우파니샤드>, <아쉬타바크라 기타>, <아바두타 뿌라나>,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타>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영어로 씌어진 스리 바가반의 저작들도 공부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한번은 그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는데, 자신이 아직 한번도 스리 반가반을 찾아뵙지 못했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단 몇칠 예정으로 여기를 온 것이다. 그는 스리 바가반 접촉과 마하지쉬의 은총만을 기원했다.
마하리쉬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진아다, 구다께샤여"라고 했읍니다. 즉 , 내가 아트만입니다. 아뜨만이 스승이고, 또 아뜨만이 은총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아뜨만이 없는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와 접촉합니다. 어떤 외부적 접촉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방문자(끼소랄랄씨) : 이해합니다. 외부적 접촉을 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마하리쉬 : 그 어떤 것도 아뜨만 만큼 친밀하지 않습니다.
방문자 : 또 스리 끄리슈나는 석달 전에 저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대는 나에게 무형상 숭배를 요구하는가? 그것은 '일체의 존재 안에 진아가 있고, 일체의 존재가 진아 안에 있다.'는 것일 뿐이다."
마하리쉬 : 거기에 전체 진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간접적입니다. 사실 아뜨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이 무지를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무지를 그 근원까지 추적해야 합니다. 이 무지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무엇에 대해 무지합니까? (무엇을 모른다고 할 때는) 주체와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원성이 마음의 특징입니다. 마음은 아뜨만에서 나옵니다.
방문자 : 그렇습니다. 무지 자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순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의사가 환자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나서 그에 따라 환자를 치료하듯이, 스리 바가반께서도 저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ㅇ. 스와미 요가난다가 다른 사람 네명과 함께 오전 8:45에 도착했다. 그는 덩치는 커 보여도 태도가 부드럽고 차림새가 말쑥하며,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 일행이 아쉬라맘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의 비서인 C.R 라이트씨가 여쭈었다.: 신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신은 미지의 존재입니다. 더욱이 그는 바깥에 있습니다. 반면에 진아는 항상 그대와 함께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대입니다. 왜 친근한 것을 버려두고 바깥의 것을 찾습니까?
방문자 : 그러면 이 진아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진아는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분명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대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 '존재함'이 진아입니다. '내가 있다'는 신의 이름입니다. 신에 대한 모든 정의 중에서 실로 성경 출애굽기(제3장)에 나오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 만큼 잘 표현된 것도 없습니다. '부라만이 나다' '나는 브라만이다(아함 브라마스미) '내가 그대이다'(소함) 같은 말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여호와'(Jehovah), 즉 '내가 있다'만큼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 존재는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진아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입니다. 진아를 알면 신을 알게 됩니다. 사실 신이란 다른 아닌 진아입니다.
방문자 : 왜 선과 악이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런 말들은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선과 악이 있으려면) 선과 악을 아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주체가 에고입니다. 에고의 근원을 추적해 보십시오. 그것은 진아 안에서 끝이 납니다. 그 에고의 근원이 신입니다. 그대에게는 신에 대한 이 정의가 어쩌면 더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방문자 : 그렇군요. 지복은 어떻게 얻습니까?
마하리쉬 : 지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대가 항상 지복입니다. 그런 욕망은 불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나옵니다. 그 불완전하다는 느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탐구해 보십시오. 깊은 잠 속에서 그대는 지복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지복과 비(非)지복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었습니까? 그 근원을 탐색하여 그대가 바로 지복임을 발견하십시오.
새로 얻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지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그 무지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 무지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것은 에고에게 있습니다.
에고의 근원을 탐색하십시오. 그러면 에고는 사라지고 지복이 남게 됩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대가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의문을 푸는 만능 열쇄입니다.
그런 의문은 마음 속에서 일어납니다. 에고의 근원을 탐색하십시오. 그러면 진아가 드러납니다. 그것만이 남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방문자 : 최선의 생활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마하리쉬 : 그것은 우리가 진인이냐 범인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진인은 자기와 다르거나 별개인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세계가 있고 그 안에 하나의 육신이 있으며 자신이 그 육신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와 그 너머의 것이 자기 안에 있을 뿐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소견은 그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릅니다. 시각은 눈에서 나오는데 눈은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친 눈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도 거칠게 보이고, 미세한 눈(마음)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도 미세하게 보입니다. 만일 그 눈이 진아가 되면, 진아는 무한하므로 그 눈도 무한합니다. 진아와 다르게 보아야 할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ㅇ. 나중에 요기(요가난다)가 질문했다. : 사람들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에게 주어야 할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마하리쉬 : 그것은 그 개인들의 기질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성숙한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집단적으로 주어야 할 가르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방문자(요가난다) : 신은 왜 세상을 고통을 허용합니까? 그는 자신의 전능함으로 그것을 단번에 없애 버리고, 누구나 신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고통은 신을 깨닫는 방도입니다.
방문자(요가난다) : 그가 좀 다른 방도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것이 방도입니다.
방문자(요가난다) : 요가, 종교 등은 고통에 대한 해독제입니까?
마하리쉬 : 그런 것들은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방문자(요가난다) : 고통이 왜 있어야 합니까?
마하리쉬 : 누가 고통을 받습니까? 고통이 무엇입니까?
방문자(요가난다) : 대답없음 !
마침내 요기는 일어나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스리 바가반이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하고, 자신이 급히 돌아가야 하는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는 아주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보였으며, 감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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