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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마하리쉬 가르침] 지금 여기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으십시오,말 없이~나는 누구인가? 2026. 3. 1. 20:34
ㅇ. 방문자 : 진아는 마음을 넘어서 있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즉, "마음은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마음만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조화킬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아뜨만은 죽은 마음, 즉 생각이 비워지고 내면으로 향해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 자신의 근원을 보며 그것이 됩니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지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방이 어두울 때 눈이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으려면 등불로 방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해가 뜨면 등불이 필요없고 대상들이 그냥 보입니다.
그리고 해 자체를 보기 위해서는 등불이 필요없고, '스스로 빛나는 해'를 향해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라는 반사된 빛이 필요하지만, 심장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심장 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 자신을 잃어버리고 심장이 빛을 발합니다.
마음의 상(相)은 외부의 사물들로 모습을 띠며, 그 상(相)들에서 반사된 빛이 그 대상들을 비춥니다. 이제 마음의 상(相)을 무시하고 그것을 비추는 빛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 빛은 스스로 빛나며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동요하는 마음(즉, 라자스의 활동성과 따마스의 소멸성에 연관된 마음)이 보통 '마음'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활동성과 소멸성이 없으면 그것은 순수해져서 스스로 빛납니다. 이것이 진아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달음을 얻는 수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야는 사뜨(존재)를 가릴 수 없지만 찌뜨(知)와 아난다(至福)을 가리기 때문에, 그것들은 특정한 것처럼 보입니다.(注 : 마야의 은폐력은 찌뜨와 아난다는 가리나 사뜨는 가리지 못하므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는 자각해도 순수한 의식과 지복은 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깨달을 때에 그것들이 새로운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여긴다)
사뜨는 존재요 바탕입니다. 여기서 특정한 것, 즉 무지에 가려서 자기 자신을 거친 몸과 동일시하는 개아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무지는 자기를 탐구하지 않는 것을 나타냅니다. 개아는 사실 지(知, 의식)일 뿐이지만, 무지로 인해 거친 몸과의 그릇된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 쇠공이 불길과 합쳐지면 벌겋게 단 쇠공이 됩니다. 세계와 찌뜨(순수의식)가 합쳐지면 개아, 곧 개인이 됩니다.
ㅇ. 방문자 : 드라우빠다의 사리가 끝이 없게 된다는 것(주 : '마하바라따'에 나오는 이야기 : 드라우빠다(아르주나 형제들의 부인)는 듀로다나 왕의 궁정에서 옷(사리)이 벗겨지고 모욕을 당한다. 이때 그녀가 스리 끄리슈나에게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순복하자, 벗어서 손에 쥐고 있던 사리가 끝없이 늘어난다.)은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영적인 문제들은 합리성에 꼭 들어맞을 수 없습니다. 영성은 초월적입니다. 그 기적은 드라우빠디가 순복한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비결은 순복에 있습니다.
방문자 : 심장에는 어떻게 도달합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기에 심장에 도달하고 싶어 합니까? 자기로부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까?
방문자 : 저는 제 몸 안에 있습니다.
마하리쉬 : 특정한 어느 부위에 있습니까?
방문자 : 온 몸입니다. 저는 온몸에 걸쳐 있습니다.
마하리쉬 : 어디서부터 걸쳐 있습니까?
방문자 : 모르겠습니다.
마하리쉬 : 그렇지요. 그대는 항상 심장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거기서 결코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해야 할일이 없습니다. 깊히 잠들었을 때와 생시의 상태에서 그대가 어떻게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상태들도 그대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에고의 것입니다. 의식은 내내 아무런 차이없이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방문자 : 이해는 됩니다만 그렇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 무지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을 알아내십시오.
방문자 : 이런 것은 다 너무 어렵습니다.
마하리쉬 : 어렵다는 생각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그대가 원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제가 다시 묻습니다. "그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방문자 : ( 그 질문을 하면) 제가 '나'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마하리쉬 :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 그것이고, 결코 거기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로 있는만큼 단순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 노력도, 아무 도움도 필요없습니다. 그릇된 동일시를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하고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그 상태 안에 존재하십시오.
ㅇ. 그 방문자는 다음날 또 와서 한가지 청을 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런 학식에서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해야 하는지 등을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마하리쉬께서는 침묵을 지키셨다.
당신의 침묵은 마치 "지금 여기서 평안하고 고요하게 계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그러나 질문자는 그렇게 해석하지 못했다. 그는 뭔가 구체적인 것을 원했다.
ㅇ. 다음 날 마하리쉬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염송, 명상, 혹은 요가나 그 비슷한 어떤 것을 원합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 말하지 않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더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왜 염송이니 그 이익이 어떠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합니까? 그 염송을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에 따른 과보는 누가 거둡니까? 그들은 자기를 돌볼 수 없습니까? 또 설사 다른 사람들로부터 염송이나 명상을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한 동안 하고나서 늘 그런 것이 없으면 그들은 진보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따마스가 효과가 없다고 말합니다. 환영(幻影)따위는 결코 진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따빠스를 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인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꾸준함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자기가 하는 진언이나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그 은총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염송은 단 한 번만 해도, 그 사람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 법정스님 고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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