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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우스님]육조단경 강설(1)-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육조단경해설 2025. 5. 10. 20:44
돈황본 <육조단경>의 제목은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일권(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慧能大師於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一卷)>이다. <단경>이라는 제목은 공통적으로 줄여서 쓰는 이름이다.
<육조단경>은 능조사(能祖師)의 선사상(禪思想)과 원만닦음(圓修)에 관한 설법집으로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어록이다.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혜능의 친설과 후대의 첨가된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며 어떤 인물에 의해서 이러한 내용들이 만들어졌는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혜능선사상이 남종선의 인물들에 의하여 북종선 배격을 통한 남종선의 확립이라는 일관성 있는 짜임새 속에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기조아래 드러나는 혜능 선사상(禪思想)을 개략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돈교법(頓敎法)의 근본 바탕이 되는 본래성불의 불성(佛性)사상과 찰나 깨침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중도정견(中道正見)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유전돈법(唯傳頓法)으로 점수를 배격하고 오직 돈오법만 전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혜불이(定慧不二)로 정과 혜가 한 몸인 내외명철(內外明徹)로 안과 밖이 사무쳐 밝아야 참된 견성(見性)이라고 정리했다.
넷째, 원만수행(圓修)인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는 단경 전반에 걸쳐서 들어나고 있는 반야 공(空) 사상의 원만수행(圓修)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 불오염수(不汚染修)로 물듦이 없는 원만한 수행을 진정한 닦음이라 하였다.
이러한 혜능 선사상(禪思想)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기 전까지는 먼저 가장 중요한 혜능 자신이 처음 발심하게 된 결정심의 동기를 놓쳐서는 안된다.
노모님을 홀로 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 혜능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의 많은 고뇌의 아픔을 살펴야 된다. 이것이 상지상인(上之上人)의 무구무상(無求無相)의 진정한 발심이다.
이러한 발심이 있었기에 나무 파는 필부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언구에 순간 마음 눈이 열렸다. 이러한 사실은 삶의 가치관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견(正見)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진실된 발심이 무엇보다도 수행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할 사실이다.
불성은 생명 속의 그 무엇이 아닌 서로 관계 맺고 의존하는 인연법
그럼 몇 가지 혜능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을 하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첫째 불성사상이다. 불성(佛性)이란 말은 <열반경> ‘사자후보살품’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의미를 풀어보면 일체 뭇 생명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생명의 본질적인 자성(自性)을 일러 불성이라 한다.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 속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경전에서도, “연기를 알면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 고 했다.
이 말의 뜻은 불성은 바로 연기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붓다의 49년간의 설법은 모두 연기설의 응용이라 할 만큼 연기와 관련된 것이다.
중관철학의 개조 용수는 <중론> 서두 게송에 佛性(연기법)의 작용에 대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는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단경에서 살펴보면 황매에 도착한 혜능이 오조(五祖) 홍인대사를 친견하면서 나눈 문답 중에 유명한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이라는 선(禪)문답이 있다.
홍인 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자이며 나에게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혜능이 대답하였다.
“제자는 영남에 사는 신주 백성으로 화상을 찾아 뵌 것은 다른 어떤 것도 구하는 바 없고,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홍인 화상이 힐책하는 어조로 반문했다.
“너 같은 영남의 야만인이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혜능이 답하길,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성에야 어찌 남북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야만인인 저와 화상의 신분은 비록 같이 않습니다만 불성에야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혜능은 불성을 항상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불성(佛性)이란 연기법으로써 서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서로 의존하며 서로 상즉상입하며 공생공멸의 인연법을 벗어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제행이 무상하여 고정된 실체성이 없으므로 무아(無我)라고 한다.
초기경전의 무아사상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空性)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경전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佛性)으로 인격화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는 불성사상은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의 조사가풍으로 자리 잡는다.
둘째, 유전돈법(唯傳頓法)이다. 오직 돈오법만 전한다는 것이다.
단경에서 오조 홍인대사가 『금강경』을 강설하심에 혜능이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치니라.
그 밤에 법(法)을 받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혜능은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순간 깨닫고 깨침의 경계를 말하기를,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움짐임 없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오” 라고 읊었다.
홍인 화상은 혜능이 돈오견성 하였음을 아시고 바로 천인사불(天人師佛)이라고 인가를 하셨다. <단경(壇經)>이라는 경제(經題)가 붙게 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혜능은 “오직 돈오견성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宗)을 부수도다” 라고 하였다.
셋째, 정과 혜가 둘이 아닌 정혜불이사상(定慧不二思想)이다.
<단경>에서,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정은 바로 혜의 몸이요, 곧 혜는 바로 정의 작용이니, 혜가 나타날 때 정이 혜안에 있고, 또한 정이 나타날 때 혜가 정안에 있다.”
“정과 혜는 등불과 그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도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이름은 비록 둘이나 몸은 둘이 아니니 정과 혜의 법(法)도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혜불이사상(定慧不二思想)은 바로 연기중도(緣起中道)를 말하는 것이며, 반야삼매를 말하는 것이고, 일행삼매를 말하는 것이다.
정과 혜가 머물러 있지 않고 연기중도로써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서로 통하여 잘 수연(隨緣)할 때 이것을 해탈삼매라고 하며 돈오견성이라고 한다.
<단경>에서는 연기중도의 삶을 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넷째, 무념.무상.무주(無念.無相.無住)의 원만수행(圓滿修行)을 강조하였다.
혜능은 <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무념으로써 종(宗)을 삼고, 무상으로써 체(體)를 삼으며,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큰 뜻을 먼저 밝혀 혜능의 선법(禪法)인 남종 돈오견성법이 초조(初祖)인 달마조사의 정법안장 열반묘심의 조사의(祖師意)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견(正見)의 법통을 이었기 때문에 혜능의 법(法)이 바로 달마의 선법임을 밝히고 있다.
혜능은 단경에서 무념이란 한 생각이라도 망념이 없으며, 일체법 일체처 그 어느 곳에서도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는 정념(正念)으로 정의하였다.
앞에서 무념을 종지(宗旨)로 한다고 하여 무념에 집착하여 무념을 버리지 않으면 무념은 유념(有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무념법은 생명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는 청정한 진여불성으로 연기적인 부처의 삶을 살아가도록 본래 그렇게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무주는 사람의 본성(本性)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고 전념(前念) 금념(今念) 후념(後念)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일체법에 머무르게 되면 얽매임이라 한다.
머무르지 않으면 연기중도의 삶이라고 한다.
연기중도적 삶이 바로 무주(無住)인 것이다.
다섯째, 물듦이 없이 원만한 닦음(不汚染修)을 진정한 닦음이라 한다.
다만 꿈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꿈을 실체화하지 않는 정견(正見)을 갖춘 연기중도적 삶을 말한다.
단경에서, “자기 성품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과 밖이 밝게 사무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바로 돈오견성이다.”
견성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행이니, 반야바라밀행이 물듦이 없이 원만한 닦음(不汚染修)이라 하고 이것을 원수(圓修)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단경>의 대의(大意)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니, 모든 생명들에게 불성이 있고 반야의 자연지(自然智)가 구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곧바로 돈오이기에 진여법계엔 무타무자(無他無自)인 참된 진아(眞我)의 세계를 체득하므로 원만한 수행인 보살의 삶으로 회향할 수 밖에 없는 동체대비의 삶이 실행된다.
이것은 본래부처가 부처로써 연기공(緣起空)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삶을 사는 것을 선(禪)이라고 정의 하는 것이 남종선의 선사상(禪思想)이다.
-설우스님-
[설우스님]
1971년 원명스님을 은사로 원적사에서 입산 출가,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수도암 도성암 등에서 30안거를 성만한 정통 수좌이다. 조계종 간화선 수행지침서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간화선 체계화에 큰 공을 세웠으며 선원청규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선원의 수행가풍 정립에 기여했다.
현재 조계종 승가고시위원과 기본선원 교선사로서 활동하는 한편 청주 법인정사와 창원 진불선원 선원장을 맡아 올바른 선 수행 정립에 매진하고 있다.
한편, 본 연재는 설우스님이 지난 2010년 7월과 11월 운문승가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리 편찬함을 밝힌다. 평소 화두를 들기 전에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워 정견(正見)을 세우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참선을 통해 체험하며 이어서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연기적 삶을 살아야한다는 불교관 수행관을 갖고 있는 스님의 가르침이 잘 드러나는 강의본이다.
-불교신문 2013년 3월 20일자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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