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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우스님] 육조단경 강설(3) - 최상승(最上乘)
    육조단경해설 2025. 5. 31. 21:00

     

    ㅇ. 제목에서 사상을 읽다 - 2. 최상승(最上乘)

     

    중도정견 부각위해 남.북종 차별화

    완전한 믿음은 먼저 發心이 중요

    교학은 익히는데 긴 세월이 필요하고 생활도 넉넉해야 한다.

    그런데 남방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변방지역으로 낙후되어 있어서 교학을 배우고 익힐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남방불교는 주로 광동성 광주 소주 등 양자강 이남에서 법을 설했는데, 혜능 역시 남쪽지방인 광주지역에서 행화를 펼친 것이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문화 혜택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서민을 위하여 북방과 다른 돈법 수행체계를 제시했다.

    이것이 본래 달마선에서 주장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정통 달마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남종 북종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혜능이 법을 펼 당시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다.

    남북 불교로 구분된 것은 그 이후 혜능을 따르는 후학들이 혜능 선(禪)사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돈오법인 중도정견이야 말로 바로 전승된 달마선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남종과 북종의 선사상의 차별화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남종돈교’ 다음에 ‘최상승’이 나온다.

    육조스님은 소승, 중승, 대승의 삼승(三乘)에 이어 최상승을 말했다.

    원효의 일심이 바로 최상승을 말한다.

    법(法)을 듣고 아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소승(小乘)이라면, 중승(中乘)은 그 뜻을 이해하고 스스로 자락(自樂)하면서 자기만족에서 자아(自我)도취에 머무는 것에 비해 대승(大乘)은 알고 있는 그대로를 실천하는 것이다.

    언행(言行)에 일치를 보이는 보살만행을 말한다.

     

    대승경전인 <열반경> 등에서는 대승에 대해 불성사상과 반야를 잘 살펴 일체생명들을 위해 보살의 원(願)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소승 수행자들은 열반 자체가 목적이면서 그 자리에 머문다.

    소승은 자락(自樂)이라서 중생을 위해 보살행을 하지 않고 요익중생인 이타행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부처의 근본정신을 바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승불교가 일어난 것이다.

     

    불교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혁명적인 것이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를 일으킨 것이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간 뒤 혜능에 의해 최상승을 실현시키면서 남종선의 중도정견이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혜능은 사람의 성품(性品) 그 자체에 반야지혜가 구족되어 있다는 불심(佛心)을 확실히 믿는 자는 심법(心法)에서 걸림없이 본래부처의 성품대로 부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반야바라밀의 행자(行者)가 된다는 것이다.

     

    만법과 만행이 갖춰져서 그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단경>에서는 ‘지혜로서 관하다’ 또는 이것을 ‘식심견성(識心見性-자기의 본성을 아는 것이 견성)’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완전한 믿음이 되려면 먼저 발심이 대단히 중요하다.

    <금강경>은 발심을 중시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인 사상(四相)의 양변에 치우치지 않을 것을 말한다. <금강경오가해>에서 무상무구(無相無求) 발심을 하라고 강조한다.

     

    어리석은 자의 발심은 무명업식을 ‘나’라고 붙들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양변에서 밖으로 구할 것이 있다는 유상유구(有相有求) 발심을 한다.

    그러나 무상무구(無相無求) 발심은 본래청정한 진여자성을 믿고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든 것은 연기적 관계로 존재한다는 중도정견을 확신하여 연기적 삶을 살 것을 스스로 발원하는 발심을 말한다.

     

    다음은 최상승의 세계를 말하는 ‘마하반야바라밀’을 보면 ‘마하’는 ‘크다’는 의미이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비례해 상대적으로 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효스님은 ‘크다’는 의미를 “큰 것이여 그 뒤를 볼 수 없구나. 작은 것이여 그 속을 볼 수가 없구나”라고 했고, 이 말의 의미는 크다는 것도 작다는 것도 그것이 절대적이란 것으로 봤다.

    절대적이란 온전히 그 자체라는 의미로서, 경전에서 “망고 과수원에 들어가면 오직 망고만 본다”고 했다. 이 말은 일심의 세계를 표현한 것. 중생심에서 보는 ‘크다’는 의미는 중생 이기심으로 계산으로 따지고 비교하고 차별하는 상대적 양변에서 보는 크고 작은 것이다.

     

                                                                                                                       -설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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