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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염불하는 자신이 불국토 만드는 주인공입니다현시대 스님들 가르침 2026. 5. 9. 20:45
염불하는 자신이 불국토 만드는 주인공입니다
안동 봉정사 자현스님 초하루 법문
나를 찾으려는
진정한 노력이 곁들여진
염불을 해야
나와 가정과 영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천도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지
진정한 관(觀)을 견지한다면
선(禪)과 결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공부해서 힘을 얻어
이 세상을 불국토로 바꾸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음력) 7월 초하루이고 지난 4월 보름 하안거 석 달 결제를 시작해 해제 15일을 남긴 날입니다. 또 오늘 법회는 봉정사가 매년 보름 동안 올리는 백중기도 시작 날이기도 합니다. 연일 지루한 장마가 이어진 가운데 하안거 해제를 앞두고 결제와 해제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흔히 승속을 떠나 해제를 두고 방학이나 노는 날의 시작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위한 공부는 결제 때만 하는 건 아닙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공부를 발원해서 시작한 때가 결제이고 공부를 마쳐야만 해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심출가한 출가대중이나 부처님 법에 귀의하여 발원한 재가불자나 모두 공부하는 날이 따로 있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판인데 잘 잠 다 자고 놀 것 다 놀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돈을 벌어서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남는 것 저축하면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안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로 출가자든 재가자든 어떻게든 잠을 덜자고 나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모로부터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태어나서 나라고 하는 지금의 나는 과연 누구인가’ 등을 참구해야 합니다.
사람이든 중생이든 때가 되면 몸뚱이는 버리고 극락이든 천상이든 삼악도(三惡道)이든, 어디든 가서 나야하는 것이고 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흔히 주객이 뒤바뀌어 객이 주인 노릇하고 주인이 객 노릇을 하여 육신에 팔려 정신이 혼미하고 부질없는 일로 세월을 허송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큰스님들은 법문을 통해 수행자가 세 가지 타령만 하면 도(道)에 이르기 어렵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첫째는 먹는 타령이고, 둘째가 잠 타령, 셋째로 공부타령 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왜 먹는 타령을 할까 싶지만 이는 수행하면서 그만큼 단순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먹는 타령이나 하면 철이 안 들었다고 하겠지만, 어린아이가 먹는 타령할 경우엔 그렇게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수행을 하다보면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처럼 현실 이익을 좇고 체면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할 뿐입니다.
그냥 단순해져서 어린아이처럼 먹는 것 자체를 얘기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사람이 단순하지 못하면 그것이 타령으로 들릴 것입니다. 이처럼 외호하는 소임자나 단월(檀越)이 어버이 마음이 돼 보면, 단순해지는 마음 모습이 더 부럽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익을 좇아 사는 이는 이런 이치가 쉽게 납득 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이 선방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임의로 상상하던 사람들이 막상 선원에 대중공양하러 왔다가 수좌들이 의외로 간단한 대중공양물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경우 ‘공부하는 사람이 먹는 것을 밝힌다’고 의구심을 내 신심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오히려 훌륭한 공부의 맛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세상에 맞춰 더 복잡해야 잘 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행의 분상에서 보면 세상이야 어찌 되든 그저 단순해져야 공부의 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낙을 좇았다면 출가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잠 타령을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잠을 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봅시다. 더구나 걱정 근심이 많은 사람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쉬어야 잠이 오는 것이지 번민이 많은데 잠이 오겠습니까. 반면에 밤낮으로 조용한 가운데 앉아 수행에 몰두하면 잠이 얼마나 오겠습니까. 공부는 해야겠고 몸과 마음은 생각처럼 따라오지 않고 날은 덥고 좌복 위에 종일 앉아있으니 엉덩이에 땀띠가 돋아나곤 하는데 순간순간 쏟아지는 졸음과 잠깐씩 드는 잠이 얼마나 꿀맛이겠습니까. 이 경우 그 쏟아지는 잠을 이기겠다고 몸부림치는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려봅시다. 여기에서 화두(話頭)가 성성하다면 잠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아예 공부를 포기한 경우도 잠타령과는 전혀 무관해집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그런 수행자로서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할 것인가요. 스님들이 그냥 잠 타령이나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수능100일기도 입재’를 했는데 수험생을 둔 부모가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자녀의 수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저 나무라기만 할까요.
더운 여름 석 달을 정하고 정진하는 천등선원(天燈禪院) 대중이나 제방의 여러 선원에서 하안거 중인 납자(衲子)들이 있어 그래도 한국불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있고,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에 한국불교는 희망이 있습니다. 흔히 인용하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말은 먼저 깨달음을 구하고 다음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원력의 보살이 있기에 이 땅에 불교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교를 보는 관점에 따라 이런저런 잡음이 있어도 불교에 대한 기대는 여전한 것이 그런 연유 아니겠습니까. 수행자가 있기에 육신으로서의 부처님은 가셨지만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은 영원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없이 아무리 형식으로서의 불교가 발달해도 결국 불교는 박물관에 전시 되는 신세로 남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공부타령을 봅시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실상 먹는 타령도 있고, 잠 타령도 있는 겁니다. 공부를 위해서 용을 쓰다 보니 먹어야 되고, 또 잠을 이기려고 하니 잠 타령이 나오는 것이지요. 앞의 두 가지 타령에 공부타령만 있고 다른 생각이나 망념이 들지 않는다면 이를 두고 누가 감히 논설시비(論說是非) 하겠습니까?
일상 속 사람들은 아마 공부타령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선 먹고사는데 취하여 바쁘고, 좋은 집 가져야 하고, 쾌락을 즐겨야 하는 등 당장 시급한 일이 많고 생각도 복잡해서 접근이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시주하는 공덕을 쌓으면 스님들이 그 덕에 먹는 걱정하지 않으며 공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스님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공부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 스님들이 일일부작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이라는 청규에 따라 울력(運力)을 하고 여기 봉정사에서 보듯 모든 채소를 직접 재배해 자급자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밭에 나가서 울력을 하는 것도 수행의 방편으로서, 수행의 연장선에서 하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일꾼은 공부를 해도 일삼아 공부를 하고, 공부꾼은 일을 해도 공부삼아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는 먹고 잠자고 일하고 쉬는 것까지도 공부여야 합니다. 공부 따로 자기의 삶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오면 이겨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배고프면 오히려 불식(不食)도 하고 일종식(一種食)도 하면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먹을 것 다 먹고 잘 잠 다 자고 공부하지는 않습니다. 잠을 줄이고 먹는 것을 줄여가다 보니 먹는 타령 잠 타령이 나온 것으로, 결국 공부 타령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초하루 법회에서 수행자의 세 가지 타령을 굳이 말씀드린 이유는 그것이 선방에 있는 스님들만의 특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안거대중이나 오늘부터 시작하는 백중기도에 동참하는 사부대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수행하는 마음이 없는데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영가를 위해서 염불한다고 무슨 영험이 있겠습니까. 마음 없는 그것이 바로 공염불(空念佛)이고, 소리만 쫓아 읊는 것입니다. 나를 찾으려는 진정한 노력이 곁들여진 염불을 해야 나와 가정과 영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천도재가 되는 것입니다. 염불을 해도 이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지 진정한 관(觀)을 견지한다면 선(禪)과 결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공부해서 힘을 얻어 이 세상을 불국토로 바꾸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15.4.15. 지상법석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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