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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행스님] 자기가 자기를 채찍질하면서 자기완성을 하십시오
    대행스님법문 2026. 5. 27. 21:02

     

    지금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는 작업이 정에 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마음 도리를 알고 증득해서 그 어항 속을 벗어나야만이

    자유롭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 : 젊을 때는 남들 따라 정신없이 지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보자 하다가 또 어떤 힘든 경계에 부딪쳤을 때는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변 : 우리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어차피 이렇게 나온 거 아무렇게나 하더라도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되지.’ 이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옷을 입었다가 더러우면 벗어 버리고 다시 새 옷을 입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몸뚱이도, 젊어서 병이 들든 늙어서 병이 들든 옷이 다하면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게 돼 있습니다. 새 옷만 입을 뿐이지, 즉 말하자면 싹만 없어졌다 뿐이지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소립니다. 봄이 오면 새 풀이 또다시 나듯이.

     

    그 뿌리가 죽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불씨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며 저 별성이나 혹성이나 다 그렇습니다. 수명이 짧고 길고 그럴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소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죠.

     

    우리 이 육체 자체도 실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게 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옷이 주어집니다. 세련되고 아주 좋은 옷으로 입느냐, 또 나같이 이렇게 못나 빠지게 옷을 해 입느냐, 하하하, 그렇지 않으면 짐승의 탈로써 옷을 입느냐, 독사의 옷을 입느냐. 그 여러 가지 옷이 많고 많은데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경험대로 주어지는 거거든요.

     

    우리가 탤런트로서 어떠한 배역을 맡을 때, 평상시에 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와 같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에 따라서, 무슨, 가난하고 부자로 살고 이래서가 아니라 없든 있든 자기가 어떠한 생각을 했고, 어떠한 행을 했고, 어떠한 말을 했고, 상대성 원리로써 폭넓게 살았느냐 폭넓지 못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 이런 것대로, 자기가 산 대로 심은 대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렇게 배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디서 왔는지를 필연코 알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말을 하자면,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말을 또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생명들을 막론하고 물주머니에서 나와서 물주머니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증명하건대 우리가 공기 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니까 우리가 이 도리를 알고 배우고 증득해서 그 어항 속을 벗어나야만이 자유롭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는 텔레비전도 보고, 듣는 것도 많고 보는 것도 많아서, 모두 너무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공부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좀 모르는 듯하고 어리석은 듯해야, 옛날의 선지식들이 화두를 주면 그냥 무지막지하게 밀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화두선이 그렇게 빛을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물질로다 치닫는가 하면 형상으로 치닫고, 형상으로 치닫는가 하면 모든 점에서 정신세계는 무시하고 돌아가는 경향이 많다 이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이 만물만생은 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또 우리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통신으로 전달을 하면서 살아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도리를 여러분이 하나도 몰라요. 그저 조급하게 불끈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해치워 버리고 그냥 말해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찢어 먹고 갈갈이 뜯어 먹고 하는 경향이 그런 데서 벌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도 걸림이 없이, 돌 위에 세워 놔도 살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긁어서 고(苦)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애고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모든 병고를 만들고 이럽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대육신은 지수화풍으로 한데 합해져서 이 세상에 나왔는데 지수화풍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지수화풍을 또 내놓습니다. 먹는 대로 내놓습니다. 그럼 내놓는 것 가지고 어떻게 활용이 되느냐. 바로 증발이 되고 모두 화해서 일체 만물만생에게 도로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전달한 까닭에 다시 또 먹습니다. 그러니 내놓으면 먹게 되고, 먹게 되면 내놓고 이러는 작업이 계속되죠. 이 도리를 우리가 상세히 알아야지, 목탁 치는 것만 불교가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과거에 살던 것, 미래로 인해서 오늘 현실에 오는 것, 이 전체를 삼라만상이라고 합니다. 삼세라고 그러죠. 또 삼심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삼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굴러오면서 교차하면서 살아나온 그 자기의 인과 업이, 선하게 행을 했다면 선행의 업이 있을 거고 악하게 행을 했다면 악행의 업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여러분 몸속에 다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러분한테, 그 구성원들을 교화를 시키는 데 여러분의 마음의 채찍이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위로는 일체제불과 둘 아닌 마음을 지니고서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아래로는 그 믿는 마음으로써 채찍질을 한다면 아래 내 몸속의 중생들은 스스로 제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도 그런 뜻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부처가 되느냐 중생으로 그냥 남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을 깨닫는다고 합시다. 그거를 돈오라고 한다면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이 자생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점수가 또 들어갑니다. 나를 깨치는 거는 쉬워도 둘 아닌 도리와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포착하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자생 중생들은 내가 바깥으로 끄달리게 되면 제도할 수 없습니다. 안으로 놓고 들어가야 통신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따라가서 제도가 되는데, 바깥으로 끄달리면 절대로 통신이 되질 않아서 제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정(定)에 들어야 한다.’ 이 뜻이 뭐냐. 그냥 정에 들려 하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틀고 앉아 있으면 정에 드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우리가 지금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정에 드는 방법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작용하는 그 묘법과 그 묘용과 그 광대무변한 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으로 화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전 세계에서 알면 좋겠는데, 가만히 보면 전부 타의에다가 기도하고 상대에다가 빌고 잘되게 해 달라고 하지, 자생을 제도하면서 자기를 자기가 채찍질하면서 자기완성을 하려고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그러니 안에서 제도가 못 되는데 어찌 내가 제도가 되겠습니까?

     

    업습을 녹이려면

     

    질문 : 대부분의 불자들은 업장 소멸을 하기 위해 다양한 방편으로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 관법으로 내가 여태껏 쌓아 놓은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인지요. 나의 업습을 녹이려면 어떤 식으로 관하면 좋을는지요.

     

    답변 : 자동적인 컴퓨터에서, 즉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말하고 행하고 한 그 자체가 그대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입력이 되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실질적으로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저께 일도 알고 내일의 할 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컴퓨터에 그렇게 입력이 된 대로 차례차례로 거기에서 유전성도 나오고 영계성도 나오고 또는 세균성도 나오고, 모든 게 다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인과성이나 모두 인연에 따라서 그 입력이 된 대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그걸 가지고 우리는 ‘업이다, 고다’ 이런 말을 하죠. 그런데 그것이 그게 아니라 우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것을 없애려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나오는 대로 어떠한 좋은 일이 생겼다면 ‘주인공, 감사해!’ 하고, 언짢은 일이 생긴다면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한다면 그대로 그게 대뇌를 거쳐서 입력이 됩니다. 대뇌를 거쳐서 사대를 통하면, 통신이 되면 바로 즉시 찰나에 바로 정수에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입력이 돼서 그것이 현실로 나올 때 바로 거기다 되입력을 한다면, 거기다 놓는다면 하는 소리가 ‘입력’이라고 합니다.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놓고, ‘해 주시오.’ 가 아닙니다. ‘너만이 할 수 있어.’지. 또 ‘너만이 지켜 줄 수 있어.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너만이 의사가 돼 줄 수 있어. 너만이 모든….’ 자기한테 일거수일투족 다 오는 거를 전부 거기다가 맡겨 놓고,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잘되는 거는 ‘감사해!’, 잘 안되는 거는 굴려서, 즉 말하자면 ‘너만이 그걸 해결할 수 있어. 낫게 할 수 있어.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어. 이끌어 줄 수 있어. 해결사가 돼 줄 수 있어.’ 이 모든 거를 그렇게 거기다 놓을 때 입력이 되는 겁니다. 연방 입력이 되면서 연방 없어지고 연방 입력이 되면서 없어지고, 그릇은 항상 빕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것이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또는 업보성이나 인과성이나 세균성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생기죠.

     

    아무리 기도하고 이름과 형상을 믿고 기도를 해도 그것은 거기에 통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본 자리는 일체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와 더불어 일체 만물만생이 다 거기에 통신이 되는 통신처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도 거기서만이 해결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근본 자리에 맡겨 놓는다면 우리가 이 생활을 할 때도 좀 더 늠름하고 여유 있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근본 자리가 궁금해요

     

    질문 : 저도 이렇게 나를 있게 한 나의 근본 자리에 대해 궁금해서 불교에 입문하고는 여러 불교 서적도 읽어 보고 참선도 해 보고 했지만 이해는 될 것 같은데 시원하게 확 와닿지가 않아서 답답합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 지금 내가 잘 안다고 해서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만약 댁이 구경 안 해 본 데 이런 데를 내가 구경했다고, 창살이 몇 개니 거기는 무슨 섬이 있느니 뭐, 별말을 다 해도 가서 보지도 않고 들어 보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은 그런 것을 갖다가 내가 얘길 한다고 해서 그게 적응이 되겠습니까? 그런 얘긴 할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 직접 가 봐라 이겁니다. 내가 배고프면 내가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뭐, 내가 배고픈 걸 남이 대신 먹어 준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어디까지나 눈이 떠져야 되고 귀가 떠져야 됩니다. 그런데 귀가 뜨이고 눈이 떠지고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가고, 또 남의 숙명, 타심을 다 안다 할지라도 그게 도가 아니니라 그랬습니다. 아무리 저 미국에 있는 걸 본다 하더라도 내가 집어먹을 줄 모른다면 그건 보나 마나니까 말입니다. 열 번 보는 것보다 한 번을 보고 내가 집어먹는 것이, 행하는 것이 그것이 제일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그대로 생활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아이, 부처님 법은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한데 고까짓 생활에서 무슨 쪼밀쪼밀하게 실험을 하라고 그러시니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러는데 이렇게 업신여기는 그 마음, 자기 생활을 자기가 업신여기고 자기 몸을 자기가 업신여기고, 자기 마음을, 자기 주처를 자기가 업신여기고 그런다면 어디 가서 찾습니까. 허공에다가 아무리 이름을 가지고 불러 봐도 대답 없는 허공이요, 또 이름을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 없는 이름이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알아봐도 그건 말뿐인 거란 말입니다.

     

    부처님이 이 앞에 계시다 할지라도 높이 보지 말 것이고,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여기 있다 하고, 풀포기가 있다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 이겁니다. 부처님 앞에 가서 칠성이니 무슨 독성이니, 산신이니 용왕이니, 온통 부처님이니 나한님이니 이러고 부르면서 가지각색의 구원을 받으려고 앨 쓰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되 모두 각자 나로만 생각해라. 그 형상은 내 몸이요, 바로 그 마음은 내 마음이니 어찌 둘이겠는가.” 하고요. 그 주처로만 똘똘 뭉쳐서, 바로 주처로 알아라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알게 되고 그 주처마저도 없이 나툼이라는 걸 알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열반이요, 산 열반이요, 내세울 게 없는 자유인이라 이거죠. 영원한 자유인 말입니다.

     

    이렇게 허구장창 약을 파는데도 자기에 맞는 약을 먹는 사람이 몇몇 될까마는 그래도 내가 업신여기는 것만큼 잃을 것이고, 내가 버리는 것만치 얻지 못할 겁니다. 몰락 버리되 버리지 말고, 버리지 않되 버려라. 하되 하지 말고, 하지 말되 하라. 여기 이렇게 모두 앉아 있고 일체 만물이, 이렇게 과학이 발전이 되고 물질문명이 발달이 되고 이랬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 공했기 때문에 모든 하는 일조차도 공해 버렸어요. 그냥 그 공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근데 뭘 살기 싫고 살기 좋고 이게 있겠습니까, 거기. 붙을 자리도 없는데.

     

    난 모르겠어요. 경을 나는 보질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오직 내 주처가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 후에 그 주처마저도 나툼이지, 없다는 거를 내가 시험해 본 거죠. 그러니까 내 마음을 계발하고 깨달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 주처를 알아내야 될 거 아닙니까. ‘어떤 놈이 있기에 나의 이 살기 싫은 걸 살게 했는가. 어떤 놈이 나를 생각하게 하고, 말을 하게 하고, 이렇게 움죽거리게 했는가.’ 그러고선 한번 지켜보는 거지, 뭘 그러십니까.

     

    마음이 비워지지 않아요

     

    질문 : 요즘은 나름대로 참선을 해 보겠다고 시간을 정해 놓고 좌선을 하고 있는데요, 끊임없이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비워지질 않아요. 어떻게 하면 마음이 비워질 수 있을까요.

     

    답변 : 만약에 선생님이 이 생각 저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망상이라는 것은요,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건 끊는 게 아니라 지켜보고 거기에 상관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이 나오느냐?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의식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상관하지 마세요. 생각하는 것이 쓸 일이 있으면 쓰고, 자유스럽게, 생각할 일이 없으면 꽁지가 꽁지를 물고 망상이 일어나는 거, 그저 내일 모래 한 달 후의 일인데도 그냥 오늘서부터 그날까지 그냥 속을 썩이는 거죠. 그렇게 하지 마시고 좀 여유를 가지세요. 주인공에 맡기시고 침착하게 있으면 그때에 몸으로 할 거는 몸으로 하고 말로 할 거는 말로 하고, 보이지 않는 데의 그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바로 거기서 하거든요. 그럭하면 모든 일이 다 아주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도 항상 근본이 당신이니까, ‘주인공이시여!’ 하고 모든 것을 당신이 형성시켜 놨고, 당신이 모든 것을 하고 있으니, 생각을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요, 생각을 안 내게 하는 것도 당신이니 모든 것은 당신에게 일임시키세요. 다 놔 버리세요. 모든 망상이 드는 것도 바로 자기 주처에서 내는 겁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믿고 놔 버리고, 또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전부 주처에서 들이고 내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주처를 주인공이라고 이름해서 붙이고 꼭 ‘주인공이시여, 감사합니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일임시키십시오. 그러니까 망상을 끊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녹이라 이 소립니다. 거기에 끄달리지 마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편안하지요.

     

    출처 : 현대불교(https://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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