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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법문] 두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듯이 살자현시대 스님들 가르침 2026. 5. 30. 21:14
수불스님 부산대 행정대학원 특강
“두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듯이 살자”
정신과 물질이 다르면 바퀴가 다른 수레가
방향을 잃고 제자리 맴돌며 헤매는 것 같다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이 대학에서 불교학 특강을 했다. 지난 9월10일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에서 스님은 ‘불교의 본분은 수행이다’를 주제로 약 2시간에 걸쳐 법문을 했다. 수강생은 부산지역 기업체 중역 등 40여 명. 스님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되새기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 지혜롭고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이제는 불교의 본분인 수행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의 법문을 정리했다.
종교가 생겨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불교가 2600년, 개신교가 2000년 정도 됐다. 인류의 역사와 비교할 때 작은 기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늘어나면서 점차 종교도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떤 형태의 종교가 있었을까.
과거 사람들이 인지능력이 발달하면서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갖게 됐다. 병에 걸리면 원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들이 쌓여가면서 무언가 길을 찾기 시작했다. 고민들이 세대를 걸쳐 지속되면서 유사종교가 탄생하게 된다.
유사종교 단계에서는 자연숭배나 맹수에 대한 공경이 이뤄지는데, 그런 형태의 종교행위가 발전하면서 사상적인 변화를 갖게됐다. 윤리와 도덕이 발달하면서 ‘미개한 삶이 주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씨족국가, 부족국가로, 현재의 인류로 발전하게 됐다. 그런 가운데 현대의 고등종교가 탄생하게 됐다.
종교는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가치다. 종교는 인류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기를 유발시키며 점차 성장하면서 종교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인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지혜를 준 것이다. 비행기를 상상해 보자. 허공에 5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실어나를 상상을 어떻게 했을까. 새에 대한 부러움, 하늘과 더 가까워지려는 욕망의 결과 과거의 구태의연한 사고의 전환을 이루게 되고, 결국 비행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종교는 지혜의 종교인데, 과거 사람들은 지혜란 밝음과 어둠이 부딪쳐 어둠이 깨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에 말하는 지혜란 어둠과 밝음을 두루 비치는 보편적인 가치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보같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제시하며 물질적 정신적 이익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간혹 목적으로 삼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 그 경우 종교는 기복으로 흐르게 된다. 종교의 핵심은 올바른 가치관을 전해 줘야 한다. 바른 가치관은 진리의 눈을 뜨게 한다. 진리는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실생활에서 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ㆍ도덕적으로 남을 돕고, 충분히 많은 사람과 이해의 폭을 넓히면 되지 굳이 종교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또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과학은 위성을 쏘아올리고, 인간의 복제까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다른 행성에 생명체 존재 여부에 대해 과학은 확언하지 못하는 등 완전하지 못하다.
반면 종교는 그러한 세계까지도 해석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이 종교를 믿게 하는 수단이냐, 종교의 본질적인 목적을 위한 방법이냐의 차이가 존재한다. 바른 종교의 가르침은 종교를 알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바람직하게, 보편타당하게 변화됐느냐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을 크고 제대로 된 안목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행복한 삶이 되지만, 제대로 되지 못한 안목은 오히려 삶을 허비하게 만든다.
기복에 빠져 종교가 수단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는 곧 정신과 물질이 함께 못하는 것과 같다. 마치 바퀴의 크기가 다른 수레가 제자리를 맴돌며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 같다고 할수 있다.
불교는 수행을 강조한다. 수행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전해준다. 인류의 공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아직 오지 않은 죽임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잠시 후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정기검진을 받는 것도, 혹시 모를 병을 조기에 알아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60세가 넘어 70, 80세가 되어도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늘 죽음을 기다리며 여행하는데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죽는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은 인연과 업에 따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국가나 환경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문제는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는데 있다. 알려는 마음을 일으켜, 이를 알아채고 극복하는 힘이 바로 수행에서 나온다. 철학서가 어렵다고 한다. 왜 어렵냐면 우리의 눈이 어리석기 때문에 어렵다.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깨우치면, 철학자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의미가 한눈에 들어오고, 철학서도 쉽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지혜의 눈을 뜨고 난 다음과 그 이전의 모습이 다르다는 의미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다. 한편으로 수행을 통해 삶의 질을 바꾸어 낼 수 있다. 내가 사물을 본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눈으로 현상만 보다가, 실상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때가되면 다른 세계로 간다. 종교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현상 이면의 세계, 즉 실상을 보고 생사를 뛰어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통해 눈을 뜨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눈은 첫째 눈으로 보는 육안이 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뜨는 천안, 천안을 뛰어넘는 혜안, 육체를 떠나는 법안, 최고의 가치인 부처님의 눈 불안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육안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살아간다.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천안은 안목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수행을 통해 자기의 의식을 함께 보는 지혜다. 자, 손가락을 한번 튕겨 보자. 일반인들은 손가락이 튕기는 모습만 관찰한다. 천안을 가지면 무엇이 나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 존재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약 손가락을 구부린 상태로 죽었다고 치자. 그 사람에게 누가 옆에서 ‘손가락을 펴라’고 고함을 친다. 내 몸이 그 말을 알아듣고 손가락을 펼수 있을까. 그럼 손가락을 구부린 행위는 마음이 하는 것인가, 영혼이 하는 것인가. 그런 의심을 끊임없이 지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며 정화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지혜를 통찰한 경지이며, 마음의 눈을 뜬 경지다.
마음의 눈을 떠 세상을 보면 삶은 매우 희망적이다. 그런데 과거의 인간은 창조주나 절대자의 뜻대로 피조물의 삶에 순응하려고 했다. 그런 삶은 세상 편하다. 운명대로, 창조주의 뜻대로 살면 뭐 신경 쓸 일이 있는가. 주어지는 대로 살면 된다. 그런데 농사짓는 방법을 수천년 동안 배우고 쌓아서 발달시켰듯, 인류는 수많은 지혜를 통해 현대와 같은 문명을 이룩했다. 이는 윤리와 도덕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창조주나 운명이 실은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의미다. 내 정신적 위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수 있을까. 또 후손들에게 보다 발전한 사상과 정신을 전해줄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양과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 방법이 수행이다.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과 49일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결국 그 고행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전해들을 수 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불교의 수행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곧 평화로운 상태다. 평화로운 상태는 무엇일까. 학다리는 길고 종달새 다리는 짧다. 그것이 평화다. 긴다리는 긴 대로, 짧은 다리는 짧은 대로 살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 평화다. 평등을 위해 학의 다리를 짤라 종달새에 붙힌다면 둘다 병신이 되고 만다. 평화가 깨진다. 진정한 평화는 마음의 내면과 밖이 동시에 평화로워야 이뤄진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한 마음을 지니면 내면의 평화가 오고, 곧 주변이 평화로워진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다.
끝으로 시시비비 하지 않는 삶을 살것을 권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대로 내버려 둬라. 생각에 끄달려 행동과 거친 말을 하다보면 시시비비에 걸리고 내 삶의 평화가 깨어진다. 흘러가는 것은 그래도 흘려보내는 습관을 들여보자. 불교의 수행은 그런 습관을 반복하는데서 시작한다.
수불스님은…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1975년 범어사에서 지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지유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안국선원장과 불교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부산불교연합회장과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 안국선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9월27일에는 5만여 사부대중이 집결한 가운데 한반도평화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불교의 대사회적 이미지를 크게 제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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